민족의 영산 지리산의 서북관문인
남원은 예로부터 천부지지(天府之地 하늘이 고을을 정해준 땅) 옥야백리(沃野百里 비옥한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다)라고 하였을 만큼 고랭지와 평야가
잘 어울러진 살기좋은 고장이라 하였다. 그 만큼의 역사적 애환이 깊숙히 패어 진한 그리움으로 보듬고 싶은 쓸아린 땅이기도
하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백로(白露)날에 남원땅은 풍요로운 오곡을 익어내며 배반하지 않는 계절의 섭리를 고요히 맞고
있었다.누군가가 그랬다. 남원은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그래서 외지사람들은 멀리 외형만보고 문화재라고 속는 경우가 많을 만큼 가는 곳마다
전통적 사물들을 접하기 쉬운 고장이 남원(南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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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한 곳 수지면 호곡리 796-3번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49호로 지정된 몽심제(夢心齋)가 1700년대말에 지은 것으로 200여년의 사연을
담고 인간과 삶을 같이하고 있다.
이곳 수지면은 고평리 남창리 산정리 유암리 초리 호곡리로 구성된 자연망을로 문화유산이 많이 산재하고 있으며
호곡리에 달국재(전북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는 밧홈실에서 산정리 마소로 넘는 고개. 고개를 팔 때 닭 우는 소리가 났다'고 하는 곳이다.
전국의 닭 지명에는 자손 번성과 농작물의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닭 지명을
선호한 해 지금으로는 출산 장려를 독려하는 역활을 했다.
이옥은 조선시대 후기의 집으로 한국의 전통가옥의 한 맥을
차지하고 있고 남원4대 명당 중의 하나인 곳으로 사촌 ․육촌간 같은 항렬이 82명이나 번창. 이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죽산 박씨 집안에
명당바람이 났다고 탄복했다고 한다
이곳은 죽산박씨의 선조인 고려말 유신 송암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충절을 다지며 보낸송암이 지은 시
중에 “마을 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
‘隔洞柳眠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라는 싯귀(詩句)의 끝자를 따서 즉 백이 숙제를 본받아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키겠다는 선조 박문수의 의지를 후손이 그 뜻을 담아 싯구의
꿈 몽(夢)자와 집주인 박동식이 자신의 뜻을 담아 마음 심(心)을 써서 몽심재라는 당호를 짓었다.
14대조 후손으로
연당(蓮堂) 박동식(朴東式 1753∼1830)이 처음 세운 리후에 송곡 박주현(朴周鉉 1844~1910)에 이어 지금은 그의 7대손인 박인기씨가
살고 있는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대략 18새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몽심재는 전라도 일대의 선비들 사이에서 과객
대접이 후하기로 소문났던 집이였다고 전하고 있다.
1700년대말에 지은 것으로 남북으로 긴 장방형으로 된 대지는 남으로 비탈져
있어서 사랑채는 2m나 되는 높은 축대위에 세워졌으며 문간채는 사랑채보다 한층 더 낮은 대지위에 섰다. 나무가 지니는 고유한 결이 하나의
예술적 문양처럼 아름답기 그지 없다.
건물은 ㄷ 자형 안채와 전면에 세워진 일자형의 사랑채를 중심으로 안채 서측에 고방채(3칸),
서쪽광(정면 3칸 측면2칸)이 있으며 동측에 있던 3칸의 광채는 근년에 철거되었다 한다.
명문가 사랑채는 접빈객이 이루어지는
남자들만의 공간이자 문화공간이었던 것이다.
뿐아니라 많은 사람을 접대할 수 있는 사랑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재력이
밑받침되어야 운영이 가능했었다. 적어도 1천 석 이상의 재산이 있어야 손님 접대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고, 전국적인 소문이 날 정도가
되려면 3천 석 이상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사랑채 서측에는 중대문(4칸)이 이어 달렸고 사랑채와 문간채 사이의 동측에
행랑채(4칸)가, 그리고 이에 마주한 서측에도 마판채(3칸)가 있었으나 철거되었다.
문간채는 7칸이었으나 현재는 5칸만 남아
있다. 대부분 건물의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건물의 배치 등은 전북지역 상류층 가옥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평면 배치상
특이점은 안채 서측에 마루와 방을 두어 주부의 생활이 편리하도록 배려하고 대청 동측에 도장을 설치하고 건너방을 아래쪽에 두어서 채광이 잘 되도록
하였다.
또 사랑채에는 방을 일곱 개나 두어 대청보다는 실제 주거 공간의 확대를 꾀하고 있는 등 매우 치밀하고 깊은 배려 끝에 이 집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매우 호화롭게 지어졌는데 전면에 세워진 기둥이 모두 팔각기둥을 사용하고 있어 매우 희귀한 예로 건축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주초도 이러한 기둥에 걸맞도록 정성껏 다듬어진 것을 사용 품격을 더하는 노력을 나타내고 있다.아랫사람들이 거주하는
문간채 동쪽에 대청 한 칸을 둔 것은 다른 상류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예로서 하층민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을 등지고 앞이 훤하게 트인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여러 채의 건물이 산자락의 급한 경사면을 따라 앞뒤로 자리하고 있어
높이를 달리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보이며, 좌측에는 양반들의 상징물이였던 사각형의 작은 연목과 꽤 큰 바위에 무어라 새긴
글씨가 써 있었다.
그 뒤편의 바깥채와 중간문은 각기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세웠다. 안채에도 아래의 공간을 외양간으로 사용할 만큼
높은 받침부를 두었다. 건물들이 높이 솟아 있음에도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멋과 그윽한 정취를 자아내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몽심각이 있는 수지면 호곡리 외호곡(外好谷) 호음실(虎音室)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전 고려 공민왕때 문하시중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 1342~?)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권세의 무상함을 개탄하고 72명의 고려 중신들과 함께 개성
두문동(杜門洞)으로 은둔하면서 처가가 있던 남원시 수지면 지금의 초리에서 서당을 세우고 은거했다.
이후 조선조 숙종때에 지은당
박시채(朴時彩, 박문수 12세손 영조대) 집안에 재화가 끊이지 않자 아들 4형제와 당질 한분을 데리고 호곡(好谷)으로 이주, 번성하여 집성촌을
이루며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전통가옥 남원 몽심재 기록화사업으로 몽신제 옆 사당과 삼강문 사당(祠堂) 종가
오른쪽으로는 중시조인 박문수의 불천위(不遷位), 나라에 세운 공훈으로 사 당에 영구히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 사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당 주련에는 박문수의 시구가 써 있다.
삼강문(三綱門) 죽산 박씨들이 호곡리로 이주한 뒤에 종가도 현재 몽심재 바로 옆으로
옮겨왔다. 종가 대문에는 ‘삼강문(三綱門)’이라는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삼강(三綱)’에 해당하는 충신, 효자, 열녀가 모두 배출된
집안임을 나타내는 현판이다. 문 옆에 달린 건물은 요요정(樂樂亭)이다.
그 바로 앞에는 연지가 있고 주변에 바위에는 전와(靖窩)
존심대(存心臺) 주일암(主壹岩) 천창애(千蒼崖) 염타진적(廉他眞適)이라는 단어의 글씨의 음각이 각인되어 있었다.
고려사.세종실록
등을 평찬한 정승임에도 한평생 검소한 삶 귀감이 된 정창손(鄭昌孫 태종 2 1402년 ∼성종 18 1487)이 남원에
들리고 숭악춘한설만산(嵩岳春寒雪滿山)이라는 제목의 시에,
"환해(宦海 벼슬길)에 부침(浮沈)하니 가는 곳마다 어렵다가, 남쪽에
와서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네.
창에 밤이 고요한데 바람은 대를 울리고, 숭악(崇岳)은 봄에도 차가워 눈이 산에 가득하네.
나그네 몸은 푸른 산 속에 노닐고, 어버이 생각하는 꿈 흰구름 사이에 둘렀네.
괴로운 인생 벼슬에 얽매여 물외(物外)에 한가로이
소요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