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는 1세기에 크메르족, 즉 캄보디아족이 건국한 동남아시아에서는 최초의 나라(푸난;扶南)이다. 그 뒤 몇 차례의 성쇠는 있었지만 메콩삼각주를 중심으로 해상교역국으로 번영하였고, 인도문화를 받아들여 크메르문자를 만드는 등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켰다. 특히 9세기 초 자야바르만 2세가 브라만교에 의한 신권정치(神權政治)를 펴서 웅대한 석조건축을 남기는 등 앙코르문화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나 13~14세기에 이르러 동쪽에 있는 베트남과 서쪽에 있는 타이가 강해지면서 그 압력에 눌려 1431년 수도 앙코르마저 포기하게 되었다. 그 뒤 가까스로 존속하고 있었으나 19세기로 접어들자 유럽인이 진출하여 1863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고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방의 일원이 되었으며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일본군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 동안 군주제도는 그대로 계속되었으나 1941년 왕위에 오른 N. 시아누크가 1947년 왕국헌법을 발포함으로서 입헌군주국을 발족시켰다. 1949년 프랑스연합 내의 일국으로서 한정적으로 독립하였다가 1953년 완전 독립하여 1954년 제네바협정에서 자주독립의 중립국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독립한 뒤에 4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첫번째는 시아누크의 캄보디아왕국으로서 1970년까지 이어졌다. 뒤이어 시아누크의 외유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1200년간이나 지속되었던 군주제도를 쓰러뜨린 론놀이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캄보디아공화국을 세웠다(1970~1975). 그러나 시아누크는 망명지 베이징[北京(북경)]에 머무르면서 캄보디아민족통일전선을 조직하였다. 베트남전쟁중 중국이 캄보디아민족통일전선을, 미국이 론놀정권을 도와 내전으로 이어졌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원조를 중단하자 통일전선측이 우세하게 되어 1975년 4월 론놀정권은 쓰러졌으나 내전이 끝난 뒤 1976년 4월 캄보디아공산당서기장 폴포트의 민주캄보디아정부(폴포트정권)가 발족되었다.
그러나 폴포트정권은 농업을 기본으로 한 원시공산주의에 바탕을 두는 경제정책의 실패, 반대자에 대한 대량 숙청, 베트남과의 국경분쟁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며 약 2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캄보디아인이 학살이나 가혹한 노동으로 죽는 <킬링필드>사태가 벌어졌다. 그 때문에 1978년 12월 베트남의 도움을 받은 캄보디아구국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어 베트남군과 함께 수도 프놈펜 등 여러 도시를 점령하였고 1979년 10월 헹삼린의장을 수반으로 하는 캄보디아인민공화국(헹삼린정권)이 발족하였다.
한편 프놈펜에서 쫓겨난 폴포트정권은 국내 각지에 분산하여 게릴라활동으로 들어갔다. 민주캄보디아정부는 그 뒤 우여곡절을 거쳐 1982년 7월 손산 전총리가 이끄는 반공민족세력인 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KPNLE) 및 시아누크파와 민주캄보디아연합정부(대통령은 시아누크)를 수립하였다. 1982년 7월부터 베트남군의 부분철수가 시작되어 1989년 9월 완전철수하였다.
1990년 9월 내전당사자 4파가 신정부수립까지 최고국민평의회(SNC)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고 1991년 7월 파리평화협정에 조인, 베트남군 침공 이래 13년간 끌어온 내전이 부분적으로 종결되었다. 1993년 9월 신헌법이 발포되고 시아누크국왕이 즉위, 입헌군주제가 부활하였다. 1996년 8월 크메루 루주의 제2인자 이엥 사리의 투항과 1999년 3월 지도자 타목 등의 체포로 크메루 루주는 사실상 궤멸하였다. <킬링필드>의 주역인 크메루 루주 지도자 폴포트는 1998년 벤 부근 산악지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998년에 출범한 훈센총리는 2000년 2월 시아누크국왕 사후에도 입헌군주제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2년 2월 최초로 캄보디아 지방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캄보디아인민당이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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