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지 석인 왕상이 있다
머리 부분만 내 놓은채 도로 갓길에 방치되어 소중한 문화재가 저리 관리 되어야 하는지 아쉬움을 더했지만
늦게나마 군산대학교 박물관장 팀에 발굴 된다 원래 위치에 발굴 복원이 원칙이지만 순창으로 가는 우회 도로가
아직 개설 되지 않아 안전한 장소로 이전후 전라선 철도 자리로 순창방면 국도가 우회 된다면 다시 제자리로 복원 되었음 한다
특히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만복사 저포기와 남원성 전투에 왜구들이 만복사 사천왕상을 들고와
남문성밖에서 그들이 남원성 함락에 쓰여 철저히 파괴 되었다 남원성민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만복사가 정유재란의
왜구의 침입으로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불까지 태워져 슬픈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더욱 고증에 의한 발굴이 절실 하다
철재 안전 보호대가 설치 되어 있다 하지만 빗길이나 눈길에 대형 덤프 트럭등이 덮쳤을경우
목이 부러진 사고라도 난다면 큰일 아닌가 그럴 바엔 차라리 안전한 장소로 옮겨져 우회도로가 나고 지금에 도로를
절터로 복원 시키고 석인왕상이나 바로앞 당간지주도 잘 정리 했음 한다
마대로 촘촘이 싸인것을 봐서 예전에 발굴 했던 흔적이 보인다
높이 5M넘을 것으로 보이는 석인왕상 몸통 부분에 빗살 무늬가 선명하고 보존 상태가 잘 되어 다행이다
군산대학교 박물관장이신 郭 長根 교수님이 왕상 받침 부분과 기단 부분을 직접 확인 하시면서
발굴 하고 계신다
==============================================자료 출처
등록번호 제139호 만복사지 이왕석상(二王石像)
[종류 및 형상대소] 화강석의 이왕상(二王像, 仁王像을 말하는 것인듯)으로 하나는 높이 8척, 또 하나는 높이 3척이다.
[소재지]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면 왕정리
[소유자] 국유
[현황] 1체(體)는 두부(頭部) 및 하반신(下半身)만 남아 있다.
여길 보면, 두 개의 석상이 남아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일제 초기 혹은 그 이전부터 그 가운데 하나는 3분의 1토막과 머리부분만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아래의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사진자료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말이다. 이것은 1910년 늦가을에 촬영된 것인데, 당간지주 앞에 서 있는 석상 하나는 멀쩡한 상태이지만, 그 옆에 반쯤 드러난 석상은 이미 동강이 나서 부러진 것인 듯이 보인다.
▲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만복사지당간지주 및 석인상(왼쪽)과 만복사지 오층석탑(오른쪽)의 모습이다. <조선고적도보>의 편저자인 동경제대 건축과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일행의 고적조사행로에 비추어 보면, 위의 사진자료는 1910년 11월 9일에 촬영한 것이 확실하다.
▲ <국보도록> (1957)에 보이는 만복사지 당간지주와 석인상의 모습이다. 이 사진의 촬영시점은 분명하지 않으나 절반쯤 땅에 파묻힌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주변지형의 상당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 <고고미술> 1965년 6월호에는 만복사지 석인상이 '재발견'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에는 석인상을 원래의 지표면까지 발굴도 하고 부러진 한쪽의 부재도 찾아내게 되었는데, 이때에 이 석인상의 용도가 흡사 '당간지주'와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 이재준, <한국의 폐사> (1995)에 수록된 만복사지 석인상의 모습이다. 아마도 1980년대에 이뤄진 발굴조사 직전에 촬용된 모습인 듯하다.
해방 이후 이곳 만복사지가 전면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은 1979년부터 1985년에 이르는 시기였다. 이에 관한 기록으로는 정구복(鄭求福), <남원만복사지제1차발국약보(南原萬福寺址第1次發掘略報)>,《고문화(古文化)》18, 1980이 있고, 종합보고서로는 전북대학교박물관(全北大學校博物館), <만복사 발굴조사보고서(萬福寺 發掘調査報告書)> (1986)가 있다.
그런데 정식발굴이 이뤄지기에 앞서 석인상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소개된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1965년 5월 21일과 22일자의 여러 일간지에 보면, 이곳 만복사지의 법수석상(法守石像)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잔뜩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고미술> 1965년 6월호에도 이에 관해 제법 상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당시에 이것이 마치 새로 발견된 유물처럼 보도되고 야단법석을 떨긴 했으나, 기실 앞서 <조선고적도보>에서도 보았듯이 그 존재는 새삼스러운 것이 전혀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 당시에 발견아닌 발견으로 인해 석인상 주변을 직접 발굴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로 인하여 이 석인상(두쌍)의 구조와 용도가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고, 특히 그 동안 망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부러진 석상의 중간 토막도 찾아낸 것이 큰 성과라면 성과였던 것이다.
(이 부러진 토막에 대해서는 <고고미술> 1965년 6월호에 채록된 바에 따르면, "마을사람이 26년전쯤에 교량공사 당시에 방해가 되므로 절단한 보았노라"고 증언하는 대목이 들어 있지만, 이는 잘못된 증언일 가능성이 높다. 26년전쯤이라고 하면 해방 전후의 시기인데, 앞서 <고적급유물등록대장>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한쪽 석상이 이미 1920년대 이전부터 부러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세월이 흘러 이곳이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거쳐 가람배치의 형태가 밝혀지고, 이때를 계기로 매우 단정한 모습으로 절터가 다듬어지게 되었으니 오늘날 만복사지의 풍경이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인 듯하다.
그런데 1965년 5월 20일에 이뤄진 석인상 발굴소동 때에 잠깐 그 모습을 드러낸 부러진 석상 토막은 그후 어떻게 처리되었던 것일까?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따로 수습한 것인지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따로 만들어졌다는 한쪽 머리부분은 지금 절터에 그대로 잘 남아 있는 건가?)
언젠가 이 석인상 옆을 지나는 국도가 다른 곳으로 돌려지면, 목까지 채운 흙들을 걷어내고 원래의 모습을 다시 드러낼 날이 꼭 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바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석인상의 가치가 재평가되어 예전에 이것이 '고적급유물등록대장'에 등재되었듯이 보물급 문화재의 반열에 오르게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덧붙여 본다.
(아닌게 아니라 전라북도 혹은 남원시 측에서 조금만 더 관심과 배려가 있다면, 지금에라도 이 석인상은 지방문화재로라도 지정하여 관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은데, 왜 아무도 그렇게는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흐르는 곡 //영화 태극기를 휘 날리며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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