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문화유산

남원성 발굴

모글리一兵 2008. 11. 26. 21:58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남원성(南原城)은 신라 신문왕 5년에 축조되었다고 했으나 백제때 축성된 성으로 추정된다. 남원성은 읍성(邑城)으로 행정치소를 방어하고 관청과 관리, 향리, 수공업자들이 거주하던 남원의 행정치소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남원성은 둘레 8,199자(尺, 약 2.5km), 높이 13자(약 3.1m)의 석축으로, 안에는 우물과 샘이 71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원성은 1597년(선조 30)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개축하면서 성벽을 높게 쌓았으나, 1597년 8월 정유재란대 전라 병사 이복남(李福男)과 관군 1천 명・명나라 원군 3천 명・성내 주민 6천 명이 나흘 동안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왜구 5만 6천 8백명을 맞아 싸우다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 싸움으로 왜군의 전력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명나라 장수가 구원병으로 싸운 전투에서 패한 명나라는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로 구원병을 2배로 보내 정유재란을 종식시키는 단초가 되었던 싸움이다. 이때 왜군은 남원성에서 귀 421수를 베어 갔으며 포로를 노예로 파는 만행을 저지르고, 150여명의 도공과 기술자들을 잡아갔다. 이때 남원성을 지키다가 장렬히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바로 만인의총(萬人義塚)이다.

1700년대에 제작된 「남원부지도」(南原府地圖)에 의하면 남원성은 마치 바둑판처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길이 나 있고 이에 따라 외곽이 네모 반듯한 성터이다. 성곽 밖으로 넓고 깊은 해자가 만들어졌고, 요천물을 끌어들여 채웠다. 사방에 성문이 있었으며, 성문마다 해자를 건너는 다리가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왜군과의 싸움에서 이 해자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성안에는 조선 태조의 전패를 모시던 객사인 용성관(龍城館)과 관아 등 건물이 다수 있었고, 성문 중에서는 남문이 가장 장대하다. 남문에는 홍예를 튼 석축이 있으며 그 위에 완월루라는 누각이 올라서 있다. 갑오농민전쟁 때 동문과 남문이 소실되고 서문과 북문은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 성곽은 조선말까지 남아 있었으나 도시가 확장되면서 대부분 헐려 나가고 현재 동충동에 북쪽의 성벽 일부만 남아 있는 성벽을 복원해 놓았다.

 

한전 남원 지점 지중하 사업 , 남원시청 상하수도 공사,도로 보차선 구분 공사  루미라리 구간 (정화 극장 사거리~순창 사거리)

공사 하시는 분들  상가 상인 주변 주민들 민원에도 불구하고 야간에 철야 작업 하르라고 수고가 많습니다

남원시장님께서 의욕적이고 열정적으로 밀어 부치는 사업이라...  이미 망가진 남원성은 복원은 커녕 개발에 밀려

그저 역사속으로  빛을 보지 못한채 도심 도로속에 뭍혀 지게 되었네요 무척 아쉽네요

일부에서는 남문과, 망루, 루각,  해자만이라도 복원 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제일은행 사가  남원시 요지라 쉽지는 않나 봅니다

 

저역시도 회사 시설이 도심지에 광케이블 통신설로 인프라 구축된 시설 보호로 매일 저녁에 출근 하르라고

초 뺑이는 치고 있고   산과 놀러도 못가고 미치겠네요 공사가 빨리 끝났음 합니다   넘 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