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문화유산

운봉 연재 (여원치) 마애불이야기

모글리一兵 2008. 10. 15. 22:52

찾아 가는길=남원출발 국도 24번 운봉 함양방향 운봉 연재(여원치)정상에서 보면 선돌이 보인다

선돌기점으로 해서 남원 방향으로 100 미터 정도 가드레일 따라 내려오면  큰 써나무가 보이고 콘크리트 도수로 따라 10 미터 내려오면

마애불이 나온다 찾는데 무지 힘들었다 근처  사람들에게도 불어 봐도 잘 모르고 이정표도 없다

더욱 놀라운것은 국도24번 10미터 낭떨어지 같은 곳에 있으니 관리가 아쉽다

바위에 새겨진 양각화는 온화한 인상에 잘 짜여진 석공에 예술성이 보인다

머리부분이 많이 훼손되어 있고 왼손이 없고  오른쪽 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 모습이 무언가 사연이 있는듯하다

설화에의하면 왜장이었던 아지발도(阿只拔都)가 함양에 살던 그녀의 젖가슴에 손을 대며 희롱하므로 칼로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쳐서 잘라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돌기둥 2개는 보호각의 흔적이다. 불상의 머리부분은 약간 파손된 상태이며 가슴 아래 부분은 땅에 묻혀 좌상인지 입상인지도 모르겠다. 두광이 보이고  두 귀는 길어 어깨에 닿았고 턱의 윤곽은 뚜렷하며 목에는 삼도를 표현했다. 법의는 통견이며 왼쪽팔은 떨어져 나갔다

불상 옆면에는 1901년(광무(光武) 5)에 당시 운봉현감이었던 박귀진이 새긴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는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거두기 전에 꿈에 노파가 나타나 이길 것을 말해 주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우왕(愚王) 6년인 1380년, 부산을 시작으로 함양을 점령한 왜구들이 운봉에서 가까운 인월까지 쳐들어왔다. 조정에서 이성계를 이 지역으로 내려 보내 고을을 지키게 하였다. 그가 남원에서 운봉으로 진격하는 길에 여원치에 다다랐는데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게 끼더니 노파 하나가 나타났다. 도고라는 그 노파가 이성계 장군에게 왜구들과 싸울 전략이나 싸울 장소와 같은 것을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는데 과연 그 노파의 말대로 하여 연승하며 왜구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후에 이성계는 여원치 정상에 진을 치게 한 그 노파에 대한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고갯마루의 바위에 노파의 상을 새기고 전각을 지었으며 산신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눈앞의 상은 불상조성의 요소를 모두 갖춘 엄연한 여래상이며 그렇기에 더구나 여상은 아닌 것이다. 물론 여느 불상보다는 얼굴이 풍만하고 몸집 또한 살집이 넉넉하며 또렷한 입술과 신체에 비해 작게 표현된 손과 같은 것들이 여성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성계와 관련된 설화 자체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운봉에서 인월로 나가는 길에 그와 관련된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을 뿐 더러 여원치 근처에는 병사들이 주둔했던 것을 암시하는 병막동(兵幕洞)과 같은 지명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성계는 여원치 전투의 승리로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가 된 인물이다. 그 후 마을 원로들이 이성계와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의 발길이 닿은 여원치의 전투를 미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왕이 자신의 고장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고장은 자부심을 느낄만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존재하던 마애불을 원용(援用)하여 설화를 완성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