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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실상사

모글리一兵 2007. 5. 19. 22:18

찾아 오시는길 : 88고속 도로 지리산 IC=인월 사거리에서 지리산 산내 방향 =산내면에서 우회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실상사 가 자리 한다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흥하면 실사사가 망한다는 구전인지 속설인지는 모르지만

암튼 비가내리는 5월에 산사도 운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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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사 석장승 민속 자료 (민속자료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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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나  사찰을 수호했을  석장승 투박하면서도 해탈적인 모습이다

실상사 입구에 굿건히 버티고 있는 모습이 친근함이 넘친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 나온 둥근 눈과

주먹 코  커다란 귀  남녀 음양 조화를 이루면서 실상사 입구에 잘 배치 되어 찾는이를 반가이 맞아 준다

어셥셔 라고 ㅋㅋㅋ 헌데 뒤어 쓰다 버린 냉장고며  뒷 배경이 쪼매 거시기 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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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선종 가람인 실상사는 지리산 주능선에서 뻗어 내려온 너른 평지에 자리잡고 있어 색다른 산사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불국사 석가탑 상륜부 복원의 모본이 되었던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이 동서로 서 있다. 또 보광전을 지나 약사전 철조여래좌상 앞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머리 숙여지는 오랜 신앙의 뿌리를 경험하게 된다.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채에서 흘러나오는 화엄경 읽는 소리를 따라 걸으면 주인을 잃어버린 거북 모양의 탑비를 만나게 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렴풋이 '응료탑비'라는 글자가 보인다. 바로 실상사가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만나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응료'는 최초 선종가람의 개산조(開山祖)인 홍척국사의 탑 이름이기 때문이다.

홍척국사는 가지산문의 개산조 도의선사와 함께 당나라 마조 도일선사의 제자인 서당 지장선사로부터 정통선맥을 이어 받았다. 홍척국사의 가르침은 민족의 어둠을 밝혀주는 사상적 정신적 등불로 실상사 창건의 근본이 되었다. 또한 '실상사가 잘 되어야 나라가 부흥하고 일본을 제압하게 된다'는 도선국사의 비기에 의하여 실상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후 홍척국사의 법통을 이어 받은 수철대사는 의광, 흠광선사에게 법을 전하였는데, 신라말 고려초의 실상사는 이들 제자들에 의해 크게 번창했다.
번창 일로에 있던 실상사는 조선초인 1468년(세조 16) 화재 이후(정유재란설도 있음) 200여 년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스님들은 백장암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 뒤 1679년(숙종 5) 벽암(벽암)대사에 의해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으며, 1690년(숙종 16) 침허조사에 의해, 1821년(순조 21) 의암대사에 의해 계속된 불사가 있었다. 그 후 1883년(고종 20) 유생들의 방화에 의해 일부 불타기도 했으나 1884년 월송선사에 의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690년 침허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는 사적기의 기록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조사 이후 수정되어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즉 조선시대 연화문 수막새기와에 '선사연'과 암막새기와에 '연항대' 및 '강희이십년유월'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연항대선사가 1681년에 실상사를 중창했다고 보는 것이다.

실상사 산내에는 백장암, 약수암, 서진암 등의 암자가 있는데 산사의 담박하고 옛스런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로 역사가 가장 오랜 선종 사원이다. 현재는 사원의 규모가 크게 줄었지만 옛날에는 크고 웅장한 건물들이 수십 동이나 즐비하게 자리잡았던 큰 절이었다. 이 점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수많은 불교 문화재들을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간직한 실상사는 오늘날 새로운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즉 '올바른 승가상 확립'과 '승풍진작'이라는 목표로 출범한 조계종 비구스님들의 결사모임인 '선우도량'의 근본도량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승가전문교육기관인 2년 과정의 '화엄학림'을 개설하여 한국불교의 미래를 이끌어 갈 승가의 젊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실상사의 과거와 현재는 새로운 중흥이라는 역사적 마당에서 함께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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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 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서, 보광전 주변에는 약 100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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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조 약사여래좌상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고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현실이익적인 부처님이다. 이처럼 약사여래는 인간의 생노병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병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약사신앙이 전래된 이후 계속 신앙되었다.

약사불상이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약사불로 신앙되고 있는 불상 가운데 약그릇을 들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실상사의 약사여래 역시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상을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에서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상이라고도 하며, 근래에는 원래의 손이 아미타 수인을 하고 있어 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2대 조사인 수철국사가 약사여래상과 석탑 2기를 세웠다는 설이 있어 현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상은 수철국사가 조성한 약사불이 아닌가 한다.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 들판에 있던 이 불상은 약사전을 세운 후 그 안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실상사 ..

보광전 오른편에는 꽃살문이 아름다운 약사전이 있다.

약사전 안에는 실상사의 2대조 수철화상이 4천 근의 철을 들여 만들었다는

커다란 철 부처님이 계신다.

이 부처님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 들판에 계셨다고 합니다.

약사여래부처님은 아픈 곳을 낫게 해주고 현실세계의 고통을

덜어 주시는 부처님으로

오늘의 실상사가 상생과 평화의 실천을 사부대중과 지역공동체 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뜻과 같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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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실상사
글쓴이 : 모글리일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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